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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역사 방학숙제 - 창덕궁과 덕수궁

vegimil 2018. 2. 14. 21:06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이 불에 타서 재건되기 전까지 정궁으로 이용되던 창덕궁은 덕수궁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담고 있다. 1882년 구식군인들이 차별 대우를 받아 임오군란을 일으켰을 때 고종과 명성왕후는 창덕궁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군인들은 명성왕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에 쳐들어갔다. 임오군란 이후 청은 조선에 내정 간섭을 강화했고, 청을 멀리하는 급진 개화파들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창덕궁의 관물헌은 급진 개화파의 근거지로 이용되었는데 갑신정변 도중 급진 개화파는 창덕궁에서 14개조정강을 발표한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으며, 1926년 순종의 장례식 날 공산당, 천도교, 학생층이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했는데, 이 시위를 6.10 만세 시위라고 한다. 6.10 만세 시위는 창덕궁 돈화문에서 시작되면서 순종의 장례를 치르게 된다. 또한 해방이후에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였던 덕혜옹주는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1989년까지 머무르다 생을 마감했다고 하니 창덕궁은 현대사에서도 의미있는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

 

 

덕수궁은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로, 당시 명칭은 경운궁이었는데 고종이 폐위 이후에 머물게 되면서 나중에서야 그 명칭이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경운궁은 조선 중기에 건축되어 왕의 임시거처로 사용되다가 창덕궁 재건 이후에는 별궁 정도로 사용되었지만 고종이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할 때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면서 근현대사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덕수궁의 황실도서관이던 수옥헌은 중명전으로 개명되었는데, 고종은 중명전을 외신을 접대할 때 사용했다. 1904년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국권을 빼앗아가기 위해 맺었던 을사늑약은 당시 편전으로 사용되었던 중명전에서 체결되었다. 이후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즈 특사를 파견해서 일제는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했는데, 고종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식을 올리게 된 장소 역시 덕수궁의 중화전이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덕수궁에 숨어든 북한군을 제거하기 위해 미군은 덕수궁 방향으로 폭격을 하려고 했으나, 미국 장교가 이를 저지하여 덕수궁은 그 모습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렇듯 덕수궁은 근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조선의 궁궐이다.